인생에도 ‘위약’이 필요하다
오늘도 어등산에 올랐다. 요 며칠 사이 가을장마가 휩쓸고 간 까닭인 지 등산로가 축축히 젖어 있고, 곳곳에 나뭇잎과 밤송이들이 떨어져 뒹굴고 있다. 등산로 초입 가파른 계단길을 천천히 오르며 시동을 걸어본다. 오늘도 목적지는 전망대이다. 거기까지가 내 체력이 버틸 수 있는 거리이다. 통상 왕복하는데 3시간 가량 소요된다.
오늘도 산길을 걸으며 마음속에 떠도는 생각의 부유물을 하나하나 건져올린다. 모두 지나간 일들에 대한 회상 혹은 회한들이다. 집안 구석에 묵혀두었던 재활용 폐품을 버리듯 매일 매일 가져다가 버리지만 자꾸자꾸 불거져 나와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사람은 앞을 보며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실상 늘 뒤를 보며 살아가는 것 같다. 앞에 보이는 전경보다 뒤에 펼쳐진 후경을 더 깊이 인식한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나간 시간들을 자꾸 되돌아 본다.
갑작스레 야인이 되고 보니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적응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언젠가 닥쳐올 일이고 마음 속으로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면 그리 녹록치 않다.
이러한 때 헝크러진 생각과 몸을 추스르는데는 산행이 최고 보약이다.
산에 오르면 일단 잡념이 줄어든다. 생각이 많아지긴 해도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생각이 더 많다. 나는 생각이 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하나하나 실천을 쌓아가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산행은 바로 그 믿음에 강화작용을 일으킨다. 산길은 늘 굴곡이 반복된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고, 반대로 내리막이 있으면 반드시 오르막이 있다.
산길을 걸으면 내가 땀흘려 걸어온 길이 아득히 걸쳐 있다. 힘들게 내디딘 걸음이 저만치서 나를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목적지가 점차 가까워짐을 알 수 있다.
앞을 향해 걷는 일은 내가 멈춰있지 않고 굳건히 나아간다는 심리적 확신을 단단하게 해준다.
어등산을 오르면서 산행은 ‘위약’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의학적인 약효는 없지만 심리적인 효과를 통해 병을 치유하거나 완화시켜주는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를 느끼게 한다.
한발 한발 발걸음을 내딛을 때,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때 나는 희망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는 믿음 같은 거 말이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전망대에 도착했다. 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에 오르면 먼 발치에 어등산 골프장 푸른 잔디가 들어온다. 더 멀리는 선운지구 아파트 숲이 울창하게 솟아있다. 배낭에 넣어온 샤인머스켓을 꺼내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이곳에 올라온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달콤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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