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작노트

사냥 나간 아내를 기다리며

사냥 나간 아내를 기다리며

 

박준수

 

사냥 나간 아내를 기다리며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뭉게뭉게 김이 피어오를 때쯤

강가에서 노루를 잡은 아내는

갈꽃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내장을 꺼내 강물에 씻었다

나는 핏빛으로 물든 강물을 응시하다가

시 한 줄을 생각해 냈다

언덕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돋은 초생달이

죽은 노루의 눈동자처럼 허옇게

강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초생달을 바라보며

늦은 귀가길의 아내가 무사하기를 신에게 기도했다

꿈속에서 커피포트의 물 끓는 소리가 들리고

아내가 끌고 온 노루 고기를 삶는다

아메리카노 커피향이 스멀스멀 굴뚝 연기처럼 번지고

나는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만들었다.

 

'시작노트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파랑길을 걸으며  (0) 2022.11.20
콩대를 뽑으며  (0) 2022.11.15
길 위에서  (0) 2022.11.09
영산강 일기  (1) 2022.11.07
젊은 날을 퇴고하며  (0) 2022.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