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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20)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20)

 

다음날 아침 햇살이 커튼 틈새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골목길을 오가는 행인들의 소음이 간간이 들려왔다. 나는 일어나 발코니 문을 열고 거리 풍경을 내려다 보았다. 어제와 다름없는 일상이지만 마치 새로운 연극이 막을 올린 순간처럼 막연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무척이나 피곤했는지 침대 위에서 이불을 얼굴까지 덮은 채 미이라처럼 누워있었다.

나는 적막한 방안에서 무료해져갔다. 그렇다고 나홀로 밖으로 나가 거리를 돌아다닐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녀를 흔들어보았지만 기침소리만 몇 차례 내뱉을 뿐이었다. 그녀는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가라앉은 톤으로 말했다.

그렇게 고요한 시간이 한참이나 방안에 머물렀다.

12시 체크아웃 시간이 가까워서야 그녀는 미이라 상태에서 깨어났다. 어제 돌아와 그대로 잠들었는지 밀리터리룩 바지에 영문 이니셜이 새겨진 하얀셔츠 차림이었다. 그녀가 샤워를 끝내자 우리는 짐을 챙겨서 기차역으로 향했다. 서로의 행선지는 정반대였다.

나는 출장기간이 끝나서 파리로 돌아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녀는 니스로 간다고 했다. 니스는 프랑스에서 유명한 여름 휴양지 중 하나이다. 나체로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아니 파리사람들은 여름 파캉스를 대부분 니스에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핫한 곳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니스 해변에서 노을지는 풍경을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역에서 아쉬운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녀와 나는 서로 다른 플랫폼에서 각자의 열차를 기다렸다. 여러 개의 선로에서 수시로 기차들이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졌다. 드디어 파리행 열차가 플래폼에 도착했다. 나는 손을 흔들어 그녀에게 잘가라는 말을 전했다. 열차에 올라 내 좌석번호를 찾아 자리에 앉았다. 옆 자리에는 이미 건장한 흑인 청년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 열차가 바퀴를 굴리며 아비뇽을 출발했다. 나는 창밖으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 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감기에 걸려 핼쓱해진 얼굴이 떠올라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