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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이사 전야(前夜)

이사 전야(前夜)

-박준수

 

이사하는 게 그냥 몸과 짐만 옮겨가는 게 아니구나

낡은 가구와 덜컹거리는 세탁기와

읽다 만 시집 몇 권쯤 챙기면 그만인 줄 알았더니,

 

퀴퀴한 옷장에 갇힌 구멍 난 스웨터와 곰팡이 핀 잠바

그리고 빨랫줄에 널어둔 양말 몇 켤레

주섬주섬 담으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아내가 고이 모셔둔 춘란화분 몇 개 품에 안고

관리사무소에 관리비 정산하고, 가스 밸브 잘 잠그고 나가면

그 뿐일 줄 알았는데

자꾸 자꾸 캥기는 게 있다, 생각나는 게 있다

 

새벽 잠결에 들려오는 닭 울음 소리와

하루 서른 아홉 차례 지나가는 기차 소리와

철마다 바뀌는 무등산의 그림같은 풍경과

 

구름 사이로 옅은 미소를 보내는 보름달의 순정을

어떻게 챙겨서 가져가야 할지,

이 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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