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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가동 ‘일신방직’ 근대산업유산의 보고

<광주 근대화의 흔적 재발견>

1935년 가동 ‘일신방직’ 근대산업유산의 보고 

화력발전소·해방기념 국기게양대 등 수두룩
등록문화재 등재 통한 체계적 관리·활용 절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화력발전소는 보일러실과 터빈실 등 2개 동으로 이뤄져 있다. 80여년의 세월을 겪으면서 고색창연한 빛을 내뿜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공장가동을 시작해 광주산업화의 시발점이 된 일신방직이 근대산업유산의 보고로 밝혀졌다.

광주시 북구 임동 100번지 일신방직 공장 4만3천여평의 부지에는 1934년 공장 설립 당시 지어진 화력발전소, 집진시설, 고가수조(물탱크)와 저수지, 목조공장건물 등 80년 이상된 건물과 구조물들이 산재해 있다.

또한 해방 이듬해 직원들이 세운 해방기념 국기게양대가 남아있어 근대산업유산으로서 보존·관리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산업유산(등록문화재)이란 제작·건축된 지 50년 이상 지난 것으로서 기술발전 등 그 시대를 반영하거나 이해하는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보존과 활용을 위해 특별히 필요해 등록한 문화재를 말한다.

발전소 보일러실 내부는 수많은 유리창과 리벳으로 조립된 철구조물이 어우러져 인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히 도르래를 이용해 창문을 개폐하도록 고안돼 눈길을 끈다.

이 가운데 화력발전소와 고가수조, 집진시설 등은 사용이 중단된 채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사이 수차례 화재와 철거 위기를 겪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회사측은 화력발전소 건물지붕 일부가 태풍에 날아가는 등 안전상 위험이 우려돼 지난해 4월 진단을 실시한 결과 B, C등급 판정이 나와 이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창고를 신축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해 6월 철거작업을 시작할 무렵 김영호 회장이 공장을 방문했다가 이를 목격하고 중단지시를 내려 다행히 원형을 보존할 수 있게 됐다.

당시 김 회장은 “회사의 유일한 상징물이니 보존하자”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회사측은 안전을 위해 지붕덮개 부분이 떨어지지 않도록 그물로 덮고 원상태로 유지하고 있다.

회사관계자는 “이미 발전소 철거를 결정하고 창고를 짓기 위해 설계도면까지 나온 상태였다”며 “회장님이 1년에 한 차례 방문하는데 만일 그 시기에 오시지 않았다면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아찔한 순간을 회상했다.

보일러실과 터빈실 2개동으로 이뤄진 화력발전소는 붉은 벽돌로 지어져 80여년의 세월을 겪으며 고색창연한 빛을 내뿜고 있다.

원면 등 원료를 보관하는 창고는 천정에 도르래를 설치해 원료포대를 운반하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도 서까래 사이에 널빤지를 올려놓고 작업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또한 내부는 유리창과 리벳으로 조립된 철구조물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특히 도르래를 이용해 창문을 개폐하도록 고안돼 눈길을 끈다.

화력발전소는 10여년간 가동되다가 한전이 공장옆에 새로운 발전소를 건립하면서 기능을 멈추고 창고와 사무실 등으로 사용돼왔다.

발전소 바로 앞에 위치한 고가수조와 저수지도 산업유산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발전소에 물을 공급하는 한편 생산라인에 습도를 유지하고 화재시 진화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산동교 인근 극락강물을 끌어왔다. 지금도 송수관과 저수지 3기 중 1기가 남아있어 당시를 짐작케 한다.

일신방직 앞마당에는 해방직후 직원자치체제로 운영 당시 1946년 직원들이 세운 해방 1주년 기념 국기게양대가 남아있어 당시의 벅찬 감격을 말해주고 있다. 표지판에는 ‘조국 해방 1주년을 기념키 위해 1천700 종업원이 회사에 삼가 이 탑을 기증함’이라고 써 있다.

공장건물 또한 목조구조로 설계됐음에도 80년 이상을 버티고 있어 내구성과 함께 디자인 측면에서 관심을 끈다. 벽면은 벽돌이나 지붕과 서까래는 나무를 사용해 현대식 건물과 확연히 다른 모양새다.

지붕의 경우, 먼저 나무판으로 덮고 그 위에 유리섬유와 슬레이트 지붕을 얹히는 방식으로 외부에서 보는 것과 달리 매우 견고하다고 공장 관계자는 설명했다.

원면 등 원료를 보관하는 창고건물도 상당수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붉은벽돌로 지어진 창고는 천정에 도르레를 설치해 원료포대를 운반하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도 서까래 사이에 널빤지를 올려놓고 작업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들 건물은 일제강점기 전쟁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동원된 10대 여공의 고통과 희생이 각인돼 있다.

일신방직은 발전소에 물을 공급하는 한편 생산라인에 습도를 유지하고 화재시 진화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산동교 인근 극락강물을 끌어왔다. 지금도 고가수조(물탱크)와 저수지 1기가 남아있어 당시를 짐작케 한다.

아울러 정문 앞마당에는 해방직후 직원자치체제로 운영 당시 1946년 직원들이 세운 해방1주년 기념 국기게양대가 남아있어 당시의 벅찬 감격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일신방직은 1934년 종연방직(가네보방직)으로 출발했으며 해방이후 전남방직공사로 운영되다가 1951년 민간에 불하돼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종사했던 여사원들이 1970-1980년대 광주천 건너 발산마을에 집단거주해 산업화시대 상징적 공간으로 추억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발산마을과 연계해 일신방직 일부 시설 역시 산업유산의 관점에서 보존되고 활용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 담당자는 “내년에 오래된 산업시설을 대상으로 조사용역을 실시해 보존가치가 있는 것들은 산업유산으로 등록할 예정”이라며 “일신방직도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박준수 기자 jspark@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