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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의 추수 과수원의 추수 과수원에서 과일만 재배하는 것은 아니다. 감나무와 복숭아나무 군락 사이로 군데군데 빈땅이 있어 여러 가지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 우리과수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구나 일부는 마을 주민 소유의 땅이어서 다양한 작물이 경작되고 있었다. 밭갈이는 마을에 사는 할아버지가 쟁기를 가져와 한나절 품을 판다. 우리집은 소를 키우지 않았으므로 쟁기질 하는 모습이 매우 신기했다. 더러 밭갈이를 끝낸 후 쟁기를 헛간에 놔두고 가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는 그 쟁기에 올라타 신나게 놀곤했다. 계절마다 밭에는 갖가지 작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봄에는 보리밭이 파릇파릇 푸른기운이 넘실거리고 여름에는 오이, 가지, 그리고 참외와 수박넝쿨이 자라난다. 가을에는 하얀 목화꽃이 눈밭을 연상케하고 조와 옥수수가 큰 ..
과수원에서의 일상 과수원에서의 일상 과수원에서의 일상은 여느 시골집과는 조금 다른 듯하다. 탱자울타리 안에는 부모님과 4남1녀 우리 가족만 살았다. 그래서 이웃과 접촉이 많지 않고 농사일을 대부분 우리가족의 힘으로 해야했다. 얼마간 잠시 머슴이 들어와 일손을 돕기도 했지만 어린 우리형제들도 고된 농사일에 일손을 보태야 했다. 특히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고계셔서 오랜시간 육체노동은 힘들어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주도적으로 집안일을 꾸려가셨다. 여기서 잠시 집안 내부구조를 설명해본다. 안채가 일본식 양철집이어서 내부 역시 기본적으로 다다미방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넓은 대청마루가 있었다. 안방의 경우 미닫이 벽장이 있었고 방마다 창이 달려 있었다. 작은방에는 벽장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할아버지 위패를 모신 제실이 있었다. 할아버..
비아 응암 과수원 비아 응암 과수원 일제강점기에 조성 과수원은 경계를 따라 탱자울타리가 심어져 있어 마치 성곽처럼 닫혀있는 공간이다. 외부에서 침입하기도 어렵고 안을 들여다보기도 쉽지않다. 이는 과일을 따가지 못하도록 하는 보호막 역할을 할 목적도 있지만 아마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과수원을 조성하면서 조선인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요새를 구축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논문에 의하면 구한말 의병들이 일본인 과수원을 습격한 기록들이 나타난다. 일본인 지주들은 공격에 대비해 러일전쟁에 참전한 퇴역군인을 용병으로 고용해 무기를 들고 방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탱자울타리는 담장역할을 하기 때문에 과수원이 밀집해 있는 지역은 마치 도시의 골목길을 연상시킨다. 또한 탱자울타리는 조경수 역할도 한다. 그래서 일년에 한차례씩 가지끝..
극장의 추억 극장의 추억 (1) 지금 중년의 나이라면 누구나 극장에 얽힌 추억이 많을 것이다. 1970~90년대는 ‘영화의 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영화가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광주같은 대도시는 물론이고 웬만한 시골에까지 영화관이 들어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필자 역시 영화관에 관한 추억 몇 개를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처음 경험했던 영화관은 첨단 비아동에 자리한 비아극장이다. 읍내 초입에 들어선 비아극장은 비아시장과 더불어 비아사람들의 자랑거리였다. 도시문명의 상징인 영화관이 떡하니 길목을 지키고 있으니 눈이 부실 수밖에.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이곳에서 방공영화를 본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흑백스크린에 국군과 북한군이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비아극장에..
비아극장을 아시나요 비아극장을 아시나요 농촌의 ‘밤문화’를 꽃피운 공간 1960년대 비아에는 면소재지 치고는 드물게 상설영화관이 존재했었다. 비아 중앙로 6(비아동 65-16), 현재 광영세차장 자리가 바로 그 곳이다. 도시나 읍내가 아닌 면소재지에 불과한 비아에 어떻게 영화관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TV가 보급되기 전인 1950년대에서 70년대 농촌에서 인기있는 볼거리는 영화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라 해가 지고나면 시골의 밤은 길고 무료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고된 농삿일에 파김치가 돼 일찍 잠들지만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뭔가 청춘을 발산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런데 비아는 일찍이 비아장이 개설돼 있고 국도 1호선이 지나는 교통의 중심이라 흥밋거리가 있으면 인근지역 청춘남녀들이 쉽게 몰려 들었다. 신가리, 하..
역사유산 사라진 뒤 아카이브 구축 무슨 소용 있나 역사유산 사라진 뒤 아카이브 구축 무슨 소용 있나 광주·전남지역에서 역사의 숨결이 깃든 근대문화유산들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최근 수년간 행정당국의 무관심과 도심재개발 사업 과정에서 때로는 사유재산이라는 이유로, 혹은 보존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사례가 부지기수이다. 광주시에서는 최근 20년 사이 보존가치가 높은 근대문화유산 100곳중 20곳이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시의회 장재성(더불어민주당·서구1)의원은 지난해 제293회 임시회 시정질문에서 2002년 ‘근대문화유산 전수조사’를 실시할 당시 광주시에는 100곳에 달하는 근대건축물이 있었지만 현재 이 중 20곳이 철거된 상태라고 지적한 바 있다. 철거된 건축물은 조대부고 본관, 전남경찰청 민원실, 뉴 계림극장, 현대극장..
남도의 새벽에 묻는다 남도의 새벽에 묻는다 신축년 벽두, 남도는 지금 하얀 설국(雪國)이다. 헐벗은 대지가 눈 이불속에 포근히 잠들어 있다. 소백산맥의 줄기인 무등산, 월출산은 들짐승처럼 낮게 허리를 굽히고 잔뜩 웅크리고 있다. 그러나 갈기갈기에는 잔설이 쌓여 칼날처럼 결연한 기상을 드러내고 있다. 영산강은 은백의 영토를 헤치고 제 물길을 가느라 숨이 가쁘다. 지난 경자년 한 해 코로나로 만신창이가 된 남도의 대지는 신축년 새아침 다시 순결하게 가슴을 열었다. 정한수 떠놓고 기도하시는 늙은 어머니의 손길이 우리의 지치고 야윈 마음을 다둑인다. 한(恨)과 신명의 땅 전라도 남도의 질긴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가. 한(恨)과 신명이다. 한(恨)은 억눌림이요, 신명은 떨치고 일어남이다. 수천년 극과 극의 에너지가 분출돼온 곳이 남도땅..
연하장을 다시 읽다 연하장을 다시 읽다 지난 세밑에 몇통의 신년 연하장을 받았다. 휴대폰을 통해 간편하게 소식을 주고받는 요즘 시절에 우체국을 거쳐온 연하장을 받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새해 시작을 알리고 축하하는 글을 담아 전하는 연하장의 풍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서양에서는 15세기 독일에서 아기예수의 그림과 신년을 축하하는 글을 동판으로 인쇄한 카드를 만들기 시작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어 18세기 말에는 명함에 그림을 넣는 풍습이 생겨났고, 19세기 후반부터 크리스마스 카드 교환이 시작되어 점차 크리스마스와 신년인사를 겸한 연하장으로 발전했다. 코로나로 지친 마음을 위로 동양에서는 중국 주나라때 환갑·고희·미수·백수 등을 축하하는 풍습에서 유래를 찾는다. 받는 사람의 지위가 높을수록 연하장 겉모습이 화려해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