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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강 2 겨울강 2 박준수 뜨거웠던 날들은 저물고 차갑게 시들어버린 빈 껍질들이 강물 위에 부스럭거린다 겨울강에는 두 개의 선율이 흐른다 낮은 음계로 목을 돋우는 강물과 높은 음으로 물살을 거슬러 노니는 물새떼, 억새 숲은 바람의 추임새에 제 몸을 맡긴다 그러나 그들은 한 곡조로 노래한다 지난 추억들이 물비늘처럼 반짝거린다 강 한가운데 낚시를 던지는 어부의 모습이 추억을 낚으려는 나의 마음을 그리는 것 같다 삶이란 때로는 범람하는 강물에 젖기도 하고 메마른 모래톱 징검다리를 건너가기도 한다 겨울강은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추인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지 않는 강물이여, 홀로이 아득한 제 길을 가는 나그네여.
겨울강 겨울강 박준수 세상사 외로울 때면 겨울강에 가는 사람이 있다 눈도 내리지 않는 민낯 하늘 아래 철새마저 떠나버린 메마른 모래톱에 뿌리채 발목을 적시고 있는 억새 무리, 시린 것들이 다 떠밀려와 유랑하는 번지 없는 강언덕에 제 상처를 보듬고 홀로이 허물을 벗는 양버즘나무처럼 아무리 칼바람이 강을 반으로 가르더라도 겨울강에서 옛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만년필 만년필 만년필은 나에게 영감을 일깨워주는 마술피리와 같다 젊은 날 첫사랑이 수줍게 내민 초록색 만년필은 나의 심장에서 시가 솟아나게 했다 신문사 시절 만년필은 세상을 올곧게 기록하는 정론직필의 푯대가 되었다 컴퓨터가 등장해 펜으로 글 쓰는 일이 드물어졌지만, 만년필의 촉감은 늘 내 마음에 그리움으로 스며들었다. 얼마 전 아들로부터 독일제 만년필을 선물 받았다 평소 말수가 없이 무심하던 녀석이 속 깊게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던 것일까 잉크를 채워 글씨를 쓰면서 아들 생각에 심쿵 해진다.
남파랑길을 걸으며 남파랑길을 걸으며 박준수 남도 땅 외진 바닷가 보성 득량에 왔더니 투박한 손길로 나그네를 반기는 바람결 태고의 시간을 살다간 공룡이 먼저 다녀간 길을 따라 남파랑길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간척지에 자신의 탯자리를 내어준 바다는 고향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푸른 등을 내밀고 뭍을 향해 갯바위에 새긴 그리운 이름을 부른다 저만치 오봉산에 늦은 봉화를 피우는 안개 전설을 품은 마애석불이 중생을 깨우느라 나무들을 붉게 사른다 추수가 끝나 밑둥만 남은 허허로운 논배미 참새떼 떠도는 평화로운 하늘이 질박한 모국어로 가슴을 후린다 사람 그림자 보이지 않고 외줄기 경전선 기차가 들녘을 달리는 시각, 늦가을 속으로 빨려드는 득량만의 바다.
콩대를 뽑으며 콩대를 뽑으며 박준수 동짓달 무서리 내린 텃밭에서 무성한 잡초 사이로 듬성듬성 고개를 내민 콩대를 뽑았다 지난 여름 밭도랑에는 콩만 심었는데 구순의 장모님이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어느 순간 풀들이 우점종이 돼버렸다 건너편 묵은 밭도 녹두는 까맣게 말라죽고 잡초가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콩대를 거두어 마당에 옮겨놓으니 장모님이 가지런히 펴서 햇볕에 말리신다 나는 잡초를 한데 모아서 불에 태웠다 모락모락 피어오른 연기가 초겨울 들판을 가득 메운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성경말씀을 깨달았다 “알곡은 거두어서 광에 저장하고 검불은 불에 태워진다”는 것을,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쪽일까 알곡일까, 검불일까?
사냥 나간 아내를 기다리며 사냥 나간 아내를 기다리며 박준수 사냥 나간 아내를 기다리며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다 뭉게뭉게 김이 피어오를 때쯤 강가에서 노루를 잡은 아내는 갈꽃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내장을 꺼내 강물에 씻었다 나는 핏빛으로 물든 강물을 응시하다가 시 한 줄을 생각해 냈다 언덕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돋은 초생달이 죽은 노루의 눈동자처럼 허옇게 강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초생달을 바라보며 늦은 귀가길의 아내가 무사하기를 신에게 기도했다 꿈속에서 커피포트의 물 끓는 소리가 들리고 아내가 끌고 온 노루 고기를 삶는다 아메리카노 커피향이 스멀스멀 굴뚝 연기처럼 번지고 나는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만들었다.
길 위에서 길 위에서 박준수 정지된 길 위에 가을이 붉게 물들고 있다 모두가 외로워 서걱거리는 계절에 무등산 입석대 서석대처럼 면벽수행하는 도반이여, 풍진세상 뒤안길을 돌아서 두겁 쓴 멍에를 훌훌 벗어버리고 흉중 깊이 묻어둔 화두를 벗삼아 지상으로 침잠하는 낙엽 정지된 길의 끝자락에 이정표는 허무한 것 한 계절이 지날 때까지 눈보라 속에서 가부좌 틀며 아린 별 아득히 지새우는가.
영산강 일기 영산강 일기 박준수 무등산 발 아래 흐르는 출렁임이 진양조 가락으로 억새춤을 출 때 나는 긴 목을 가진 사슴처럼 유랑하리라 강가 물푸레나무 낙엽 진 길을 따라 님의 눈물어린 마파람 맞으며 논배미마다 꺾인 죽창, 피묻은 깃발을 뒤로 하고 흙바람 속으로, 흙바람 속으로 진군하리라 텅 빈 대지 위에 드리워진 개벽세상은 영산강 목마름처럼 허허롭고 저 만치 멀어진 길은 늦은 계절 언덕에 핀 수국이 어여쁘다 말없이 떠난 까마귀떼 다시 돌아오는 길목에 서서 나는 백제의 유민처럼 밤새 돋은 별을 헤아려본다 어디쯤에 천불천탑의 꿈이 일어서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