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노트 (338) 썸네일형 리스트형 가을강에서 가을강에서 어느 암자에서 스쳐간 인연인 듯 그리운 님의 뒷모습이 이렇게 먹먹하게 가랑비처럼 가을강에 한땀 한땀 파고드는가 숨가쁘게 멀어진 계절의 뒷마당에는 수취인불명의 편지들이 코스모스로 펄럭이고 내가 밤세워 썼던 답장들은 낙엽이 되어 구르네 나는 강가 마로니에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잔물결이 전해주는 미완의 문장들을 해독하느라 붉은 노을 사이로 되돌아오는 새떼들을 알아채지 못하고 퇴적된 모래톱에 쳐박혀 죽은 물고기들을 의심하네 낚시꾼들이 비에 젖은 채 물결따라 흘러가고 대신 떠오르는 건 울긋불긋한 수초들 내 마음 강물에 비추이면 몽실몽실 피어나는 옛 추억 그리운 것들이 흐렁흐렁 모여드는 가을 황룡강. 거울 거울 어느 날 거울 속에 아버지가 보였다 깜짝 놀라서 자세히 보니 내 모습이었다 절대 아버지를 닮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했는데 어느새 아버지의 초상(肖像)이 되어 있었다 적적한 마음에 노래를 불렀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구성진 가락을 따라부르고 있었다 식탁에서 내 젓가락이 자주 가는 반찬들은 생전에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것들이다 오늘도 거울을 들여다보면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의 빈 자리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거울은 말없이 비춰주고 있다. 뽕뽕다리 뽕뽕다리 -박준수 뽕뽕다리에 바람이 분다 발산 언덕에 복숭아꽃 피고, 노오란 장다리꽃 춤을 춘다 순이야, 너는 오늘도 학교 대신 방직공장 가는 길이냐 교복 대신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고 유난히 하얀 얼굴로 무등산 햇살 바라보며 다리를 건너서, 청춘을 건너서 희고 보드라운 솜털같은 풋사랑을 가슴에 품고 왼 종일 윙윙거리는 방적기 앞에서 희망의 실을 잣느라 손길이 분주하구나 순이야, 광주천 물살처럼 아스라이 멀어진 너의 10대 시절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새로 놓여진 뽕뽕다리에 돌아와 한 세월 돌아보면 강물에 비친 그리운 얼굴들 만날 수 있을까 물 위에 달빛처럼 그날의 환한 웃음 맞잡을 수 있을까 이사 전야(前夜) 이사 전야(前夜) -박준수 이사하는 게 그냥 몸과 짐만 옮겨가는 게 아니구나 낡은 가구와 덜컹거리는 세탁기와 읽다 만 시집 몇 권쯤 챙기면 그만인 줄 알았더니, 퀴퀴한 옷장에 갇힌 구멍 난 스웨터와 곰팡이 핀 잠바 그리고 빨랫줄에 널어둔 양말 몇 켤레 주섬주섬 담으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아내가 고이 모셔둔 춘란화분 몇 개 품에 안고 관리사무소에 관리비 정산하고, 가스 밸브 잘 잠그고 나가면 그 뿐일 줄 알았는데 자꾸 자꾸 캥기는 게 있다, 생각나는 게 있다 새벽 잠결에 들려오는 닭 울음 소리와 하루 서른 아홉 차례 지나가는 기차 소리와 철마다 바뀌는 무등산의 그림같은 풍경과 구름 사이로 옅은 미소를 보내는 보름달의 순정을 어떻게 챙겨서 가져가야 할지, 이 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친구여, 이제 집 주소를 변경해야겠네 무제 친구여, 이제 집 주소를 변경해야겠네 현재의 주소로 누군가 편지를 부친다면 아마도 수취인 불명이 되어 반송될 것이네 지난 2년간 메마른 흙바람이 종일 불어와 나의 창가를 맴돌던, 스스로를 유폐했던, 망루를 내려갈려고 하네 높은 곳에서 지상의 일들을 회상하는 일은 뜬구름 잡는 것처럼 부질없지만 그리웠던 추억들을 지우고 싶지는 않네 이육사의 시 ‘광야’에서처럼 목놓아 노래하고 싶은 초인은 만나지 못했지만 새벽 닭울음 소리에 악몽을 떨치는 날이 많았고 덜컹거리는 기차 바퀴 소리에 마음 한 조각을 실어 보내기도 했네 성당 종소리 아득히 울려오는 주일 오후에 나의 과오를 고백하는 순종의 시간도 강물처럼 먼 바다로 흘러갔을 터이니 안개비 가득한 광야에 젖은 물푸레 나무처럼 푸른 기억 흩날리며 나의 죄를 사할 .. 돌아갈 시간 돌아갈 시간 “청소년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밤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전파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이 목소리는, 우리 세대 10대 시절의 빗살무늬 자화상이다 시내를 떠돌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어둑해지면 길거리 점포 불빛들이 하나, 둘 꺼지고 도로의 차들도 듬성 듬성 줄어들어 도시는 조금씩 밀물이 차오른다 슬픔보다 더 아득한 우물 깊이에서 문들이 닫히는 소리 움직이는 그림자도 더 이상 출렁거리지 않을 때, 10시 시보와 함께 들려오는 여자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는 우물 저 바닥에서 길어 올린 절망처럼 내 마음을 철렁 튀어 오르게 했다 그리고 낮 동안 걸어왔던 길을 물끄러미 돌아보며 그 길을 왜 그렇게 빨리 걸어야 했는지, 가출소년처럼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딸이 돌아 왔다 딸이 돌아 왔다 딸이 돌아 왔다 서울에서 10년간 살다가 꽃화분 하나 들고 돌아왔다 통 말 수가 없던 소소한 정원에 봄비가 촉촉이 내려 나는 창문을 열어 두었다 가끔씩 기차가 풍금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딸은 그 기차를 보기 위해 슈트케이스를 들고 간이역으로 가곤했다 집에 돌아와서 슈트케이스에서 깜찍한 표정을 하고 있는 털이 희고 고운 토끼를 꺼내 놓았다 딸은 어릴적에도 상상놀이를 좋아했다 학교도 다니지 않은 나이에 학교에 가고 스케치북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책가방을 메고 잠들곤 했다 지금은 학교도 다니지 않고 스케치북에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대신에 꽃화분을 들고 온다 그래서 적막강산이던 집안에는 늘 꽃이 가득하고 향기가 흐른다. 비아장에 갔던 날 비아장에 갔던 날 문득, 고향이 그리워 찾아간 비아장은 장이 서지 않는 날이라 할매도 아짐도 보이지 않았다 햇살이 희미하게 내려앉은 골목에 백년 세월을 견디느라 주름 깊어진 장옥만 간이역처럼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장날이면 장터를 다 차고 넘쳐서 도로변까지 좌판을 펼치던 장꾼들 어디론가 떠나고, 묵은 흔적들이 하나, 둘 사위어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뚝딱뚝딱 쇠망치 소리 아련한 양철집 대장간도 어느 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 빼꼼히 현대식 건물들이 둥지를 틀었다 어머니 손맛이 정겨운 팥죽집에 들어가 맨드라미꽃처럼 붉은 추억 한 그릇 마주하니 잊혀진 옛 풍경들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내일 오일장이 열리면 또 다시 왁자지껄 사람들 몰려들어 덤으로 정으로 팔고 사는 시골장 인심이 흙바람 속에 넘실거리려나... 이전 1 2 3 4 5 ··· 4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