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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뿌리를 캐며 칡뿌리를 캐며 이른 봄 부모님 산소를 둘러보다가 허옇게 말라 죽은 소나무 관목을 보았다 온몸이 칡넝쿨로 칭칭 감긴 채 가지만 앙상한 잿빛 고사목이 되었다 길고 가느다란 혀를 날름날름 뻗쳐 지난 계절 푸른 꿈을 허무하게 앗아가버린 고약한 녀석 그를 찾아내 기필코 응징 해야겠다 다짐한다 땅속 깊이 박힌 은신처를 곡괭이로 세게 내리친다 파면 팔수록 지하로 뻗어가는 뿌리근육 개구리를 삼킨 구렁이 몸뚱아리 마냥 탐욕스러운 배가 불끈 솟아 있다 비만한 그의 허리춤을 단단히 붙들고 톱질을 한다 마침내 팔뚝만한 녀석의 몸통이 떨어져 나왔다 몸속에는 여러 갈래 손길로 휘감은 관목 수액이 섬유질로 농축돼 있다. 선량한 소나무 고혈을 빨아 어둠 속에서 마음껏 제 허기를 채운 음흉한 족속 겨우내 꿀잠에 취한 칡뿌리를 캐며 세..
역류 역류 화로에 장미꽃을 던지지 마라 붉다고 다 불이 아니다 붉다고 다 꽃이 아니다 고드름은 겨울의 내장이다 추울수록 날카로운 창이 된다 되돌아갈 수 없는 길 벼랑에서는 늘 바람이 수상하다 자신의 길을 가는 자여 피투성이 노을을 끌고가는 자여 결코 뒤돌아 보지 마라 결코 무릎 꿇지 마라.
광주·전남의 자존심은 뭔가 광주·전남의 자존심은 뭔가 며칠 전 경제부 기자 시절 알게 된 광주 하남공단 소재 한 중소기업인을 오랜만에 만났다. IMF외환위기 직후 취재차 만난 이후 20여년 만에 조우였다. 당시 30대 후반이던 필자가 이제는 60대가 되었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대화는 자연스레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금형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당시 어려웠던 상황을 극복하고 지금의 안정된 궤도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갖가지 사연들을 주마등처럼 풀어냈다. 그 가운데 오래전 그가 제안해 광주금형센터가 설립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광주가 여전히 경제적 낙후를 탈피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어 자칫 지역소멸의 늪으로 가라앉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면서 그가 제안한 여러 가지 ..
꽃은 떨어져 무엇이 될까 꽃은 떨어져 무엇이 될까 어렸을 때 마루에서 굴러 떨어진 적이 있다 하늘이 노랬다 그 마루에서 해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땅에 떨어진 계란처럼 앞산이 노랗게 물들었다 꽃이 지는 것을 보았다 꽃은 떨어져서 무엇이 될까 낙화유수(落花流水)라던데, 혹여, 영혼이 되어 머언 세상으로 흘러가는가 ..., …, … 오래된 고목 위에 올라가 원시의 밤하늘을 보라 별은 떨어져서 별똥이 되지 않은가 꽃도 떨어지면 똥이 된다 해묵은 전설도 아니다 감나무 아래 우수수 별들이 떨어져 있다 사람들은 감똥을 줍는다 하얀 쌀밥이 떨어져 똥이 된다 하늘 위 아름다운 것은 떨어져 똥이 되는 구나 천상, 그리운 사람이 귀신이 되듯이…
오색의 향연 과수원 오색의 향연 과수원 과수원은 만물이 쉴새 없이 움직이는 작은 자연계이다. 계절마다 화려한 오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작은 들풀에서부터 초록으로 물드는 들녘까지 물감을 뿌려놓은 듯 현란하다. 그 범주는 넓고 무한하다. 색의 군집을 통해 과수원의 비밀화원을 순례해보자. 색 가운데 흰색은 서민적이고 수수하다. 탱자울타리 사이 하얀꽃이 수줍게 피어 있다. 감나무 이파리가 제법 자라면 하얀 감꽃이 고개를 내민다. 감꽃을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기도 하고 먹기도 한다. 감꽃이 진 자리에 감이 맺힌다. 그리고 논에 소금처럼 뿌려진 메밀꽃 역시 장관이다. 메밀 순을 따서 데친 후 된장을 버무려 무친 메밀나물은 입맛을 돋운다. 흰색의 백미는 겨울에 맛볼 수 있다. 밤새 내린 눈보라가 만든 설원은 그야말로 고요한 은세계이다..
사라진 과수원(수정) 사라진 과수원 1993년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토지공사(현 LH공사)로부터 비아 과수원안에 있는 묘지를 이장해가라는 통지가 왔다는 것이다. 정부가 첨단단지로 지정한 광산 비아와 북구 삼소동 일대가 토지공사에 의해 본격적인 사업 착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미 보상작업이 마무리되고 원주민 이주가 이뤄진 상태에서 마지막 묘지이장이 진행되는 시점이었다. 나는 주말을 이용해 이장작업을 하자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약속한 날에 내가 살던 양3동 발산마을 아파트를 나서서 승용차로 비아과수원에 도착했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먼저 오셔서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과수원 현장은 이미 지장물 철거작업이 거의 마쳐진 상태로 허허벌판으로 변해 있었다. 탱자울타리도, 양철집도, 과일나무도 내가 뱀을 보고 줄행랑..
시골 점쟁이 할머니의 예언 시골 점쟁이 할머니의 예언 사진설명=2003년 병영초등학교 입구에 서있는 병영성터 안내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필자. 나이가 60 고개에 접어드니 지나온 길이 드러난다. 그 길을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한다. 사전에는 운명의 정의를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초인간적인 힘’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앞날을 결정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내가 운명 이야기를 꺼낸 것은 33년째 신문사에 종사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되돌아볼 때, 운명의 힘에 의해 여기까지 이끌려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리고 한 점쟁이 노파의 말 한마디가 그 운명적인 행로의 길잡이 역할을 한 것 같다. 그 점쟁이 노파를 조우하게 된 일화를 소개해볼까 한다. 2003년의 일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에 대한 인상(수정) 초등학교 선생님에 대한 인상(수정) 우리세대에게 있어서 초등학교 시절은 사회와의 첫 대면이라는 점에서 호기심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나의 초등학교 생활 역시 아련하지만 절절한 기억들이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다. 누구나 비슷한 경험이겠지만 나의 눈으로 바라본 초등학교 생활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본다. 1학년 때 기억은 입학식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머니 손을 잡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들이 반별로 다양한 색깔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내가 속한 반은 흰색깃발이었다. 가슴에 이름이 적힌 흰색리본이 달린 손수건을 가슴에 차고 1학년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일주일간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운동장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이라고 해봐야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하나, 둘 구령을 붙이며 교실과 화장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