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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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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영혼을 어지럽혀서 미안해요 당신의 영혼을 어지럽혀서 미안해요 누군가에게 슬며시 텔레파시를 보내지 마세요 그건 불장난이예요, ‘어이없다’는 말을 들을 거예요 왜 파도가 되려하나요 육지에 닿을 수도 없는 나비들의 무수한 날개짓을 꿈꾸는가요 어차피 당신은 해변의 우체통이 될 수 없어요 새들이 창공을 무리지어 날아가네요 당신의 영혼을 어지럽혀서 미안해요 꿈속에서라도 당신의 영혼을 어지럽혀서 미안해요 그대 아름다운 꽃향기에 취해 나의 영감을 팔려고 했어요 어차피 나는 당신의 이름을 알 수 없어요 이제 커튼을 내릴려고 합니다 이 밤에 나의 길 한 줄을 오래도록 써내려 합니다 당신의 영혼을 어지럽혀서 미안해요.
3월의 빗소리 3월의 빗소리 똑 똑 늦잠을 자고 있는 나를 누군가 깨우고 있네요 봄이 왔노라고 이제 그만 일어나 창밖을 보라고 페르세포네*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 봄비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와 나의 몽롱한 의식을 핥고 있네요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는 겨울의 묵은 더께를 씻겨 내느라 때론 굵게 때론 부드럽게 이곳 저곳을 어루만지다가 툭툭 대지에 노래 한소절이 되어 꽂힙니다 무심한 표정으로 칼바람에 마주했던 대지에 다시 시간이 흘러듭니다 강가 물푸레나무가 그리운 기억을 피워올립니다 명부의 겨울을 도망쳐온 기차가 기운차게 하데스*를 무너뜨리고 달려옵니다 철도원이 푸른 깃발을 흔들며 수신호를 보냅니다 3월은 그렇게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기차에서 내려 봄꽃들을 맞으러 가야할 차례입니다. *페르세포네:봄처녀, 하..
칡뿌리를 캐며 칡뿌리를 캐며 이른 봄 부모님 산소를 둘러보다가 허옇게 말라 죽은 소나무 관목을 보았다 온몸이 칡넝쿨로 칭칭 감긴 채 가지만 앙상한 잿빛 고사목이 되었다 길고 가느다란 혀를 날름날름 뻗쳐 지난 계절 푸른 꿈을 허무하게 앗아가버린 고약한 녀석 그를 찾아내 기필코 응징 해야겠다 다짐한다 땅속 깊이 박힌 은신처를 곡괭이로 세게 내리친다 파면 팔수록 지하로 뻗어가는 뿌리근육 개구리를 삼킨 구렁이 몸뚱아리 마냥 탐욕스러운 배가 불끈 솟아 있다 비만한 그의 허리춤을 단단히 붙들고 톱질을 한다 마침내 팔뚝만한 녀석의 몸통이 떨어져 나왔다 몸속에는 여러 갈래 손길로 휘감은 관목 수액이 섬유질로 농축돼 있다. 선량한 소나무 고혈을 빨아 어둠 속에서 마음껏 제 허기를 채운 음흉한 족속 겨우내 꿀잠에 취한 칡뿌리를 캐며 세..
역류 역류 화로에 장미꽃을 던지지 마라 붉다고 다 불이 아니다 붉다고 다 꽃이 아니다 고드름은 겨울의 내장이다 추울수록 날카로운 창이 된다 되돌아갈 수 없는 길 벼랑에서는 늘 바람이 수상하다 자신의 길을 가는 자여 피투성이 노을을 끌고가는 자여 결코 뒤돌아 보지 마라 결코 무릎 꿇지 마라.
꽃은 떨어져 무엇이 될까 꽃은 떨어져 무엇이 될까 어렸을 때 마루에서 굴러 떨어진 적이 있다 하늘이 노랬다 그 마루에서 해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땅에 떨어진 계란처럼 앞산이 노랗게 물들었다 꽃이 지는 것을 보았다 꽃은 떨어져서 무엇이 될까 낙화유수(落花流水)라던데, 혹여, 영혼이 되어 머언 세상으로 흘러가는가 ..., …, … 오래된 고목 위에 올라가 원시의 밤하늘을 보라 별은 떨어져서 별똥이 되지 않은가 꽃도 떨어지면 똥이 된다 해묵은 전설도 아니다 감나무 아래 우수수 별들이 떨어져 있다 사람들은 감똥을 줍는다 하얀 쌀밥이 떨어져 똥이 된다 하늘 위 아름다운 것은 떨어져 똥이 되는 구나 천상, 그리운 사람이 귀신이 되듯이…
인생은 동백꽃이더라 인생은 동백꽃이더라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지 마라 인생에 뒤안은 없다 운명 앞에 우쭐거리지 마라 화려함도, 슬픔도 눈덮이면 한갓 무심한 백사장인 걸 눈길 녹으면 진창길이다 인생은 동백꽃이더라 봄 기다리는 언덕에 서둘러 낙화하는 한점 붉은 노을이더라 인생은 동백꽃이더라 나 홀로 외로움에 지쳐 아무 말 못하고 그림자 하나 남기는 외진 계절의 마침표이더라.
인생이 쓸쓸할 날 인생이 쓸쓸할 날 장 파하고 돌아가는 길 놀음판에서 밑천 한 푼 없이 빈털터리가 된 사내가 냇가 흙다리 중간에 서서 헛웃음을 웃는다 얼치기 얼간이들에게 당하고 나니 괜스레 인생이 쓸쓸해진다. 한탕을 챙겨보고자 하는 과욕이 이렇게 허망한 몰골이 될 줄이야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며 쓰디쓴 담배 연기 후욱 후욱 뱉어내며 노을이 질 때까지 하염없이 갈대처럼 하늘거렸다.
내면의 시 내면의 시 저 높은 수직 상승 속빈 항아리처럼 울 수 있는 힘으로 슬픔을 밀어내고 텅 빈 여백의 숨결로 노래하리라 뒤돌아보지 않는 바람처럼 강물을 밀고 가는 잔물결 절벽의 아득한 소스라침으로 하강하리라 세찬 비바람에 묵상하는 바위처럼 먹빛 산 그늘 아래 수행자가 되어 북두성 밤하늘을 부둥켜 안고 개벽 세상을 꿈꾸는 천년와불이 되리라 저 광야의 눈보라처럼 한순간 아득한 들판을 삼켜버리고 순백의 낙원으로 살다가 종내는 허공의 메아리로 남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