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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20)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20) 다음날 아침 햇살이 커튼 틈새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골목길을 오가는 행인들의 소음이 간간이 들려왔다. 나는 일어나 발코니 문을 열고 거리 풍경을 내려다 보았다. 어제와 다름없는 일상이지만 마치 새로운 연극이 막을 올린 순간처럼 막연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무척이나 피곤했는지 침대 위에서 이불을 얼굴까지 덮은 채 미이라처럼 누워있었다. 나는 적막한 방안에서 무료해져갔다. 그렇다고 나홀로 밖으로 나가 거리를 돌아다닐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녀를 흔들어보았지만 기침소리만 몇 차례 내뱉을 뿐이었다. 그녀는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가라앉은 톤으로 말했다. 그렇게 고요한 시간이 한참이나 방안에 머물렀다. 12시 체크아웃 시간이 가까워서야 그녀는 미이라 상태에서 ..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19)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19) 대학생들이 노래와 춤으로 젊은 열기를 발산하는 시끄러운 소란속에서 쪽잠으로 긴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대합실은 어젯밤의 어수선한 무대에서 다시 평상시처럼 승객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성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뜬 눈으로 지새워 몸은 피곤함에 젖어있었지만 상쾌한 아침 공기 때문인지 마음은 가벼웠다. 우리는 우선 호텔 방부터 잡기로 했다. 몇 군데를 알아보았으나 낮 12시 체크아웃 이후에 오라고 했다. 하는 수없이 어젯밤 지나왔던 골목길을 다시 떠돌며 시간을 떼워야 했다. 골목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관광객들의 행렬이 모여들었다. 마술하는 사람, 판토마임하는 사람, 커다란 첼로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등등 길거리 무대가 하나, 둘..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18)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18) 가까이 다가온 사제는 우리가 당황해 하는 기색을 보이자 다시 한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가 한 말은 불어가 아니라 영어였다. “take picture for you”. “사진을 찍어주겠다 ”는 말이었는데 불어 억앙이 심해 우리가 미처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안도하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건네주며 그 앞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다. 이어 교황청을 나와서 마을 골목길 투어에 나섰다. 골목길은 상가와 주택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미로처럼 구불구불 성안에 이어져 있었다. 상가는 카페테리아, 기념품가게, 옷가게 등 흔히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작은 연극 소극장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골목길 군데군데 크고 작은 길거리 공연들이 펼쳐져 관..
제주 다랑쉬 오름 제주 다랑쉬 오름⁕ 내가 처음 본 엄마의 얼굴이었을까 처음 보았는데 반가운 얼굴 가다가 되돌아보고 자꾸 뒤돌아 보다가 다시금 그 자리에 돌아와 우물 속을 들여다 보는 아이의 얼굴처럼 해맑은 바람소리가 파문짓는 물없는 호수 내 마음 한 가운데 그리움 움푹진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보름달을 닮은 듯 밥그릇을 닮은 듯 봄이 오면 밥그릇에 푸른 밥알 가득 담아 엄마 손잡고 소풍가고 싶은 그 곳. ⁕제주도에 산재한 기생화산의 이름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17)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17) 꿈 속의 일들이 눈 녹듯이 사라져버리자 못내 아쉽고 공허했다. 그리고 꿈처럼 정말로 그녀가 문을 열고 나타날 것 같아 한참이나 귀를 세우고 기다렸으나 허망한 일이었다.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의식은 더욱 또렷해졌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10년전, 그러니까 2000년 7월 그녀와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아비뇽에 간 적이 있었다. 파리에서 니스행 떼제베(TGV·고속열차)를 타고 오랜 시간을 내달렸다. 아비뇽은 한때 교황청이 있었던 도시로 둘레가 성으로 둘러싸여 요새를 방불케 했다. 성 안에는 교황청 뿐 아니라 시청사와 옹기종기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때마침 세계연극제가 열리는 주간이어서 세계 각지에서 몰..
-2023 제주여행 3박4일- -2023 제주여행 3박4일- 잊지 못할 아름다운 제주여행 설 연휴 직후 제주에서 보낸 3박 4일 여행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아내 친구모임 ‘이삭회’에서 마련한 이번 여행은 다섯 부부 10명이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문화를 탐방하고 즐거운 대화와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돈독한 우정을 쌓은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특별히 저에게 이번 여행은 제주도의 변화무쌍한 자연과 원시성, 숨은 비경을 새롭게 발견하고, 더불어 그 속에서 살아온 제주도 사람들의 억척스러움과 애환을 느껴볼 수 있어서 더욱 인상 깊은 여정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그 여정을 따라 기억을 더듬어보고자 합니다. 티웨이 항공으로 제주공항에 무사히 도착해서 유레카 렌터카를 빌려 타고 이동, 명물식당에서 늦은 점심..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16)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16) 그녀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영화 좋아 하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물론 좋아하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럼,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라고 다시 물었다. 나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고 하자 그녀는 “한국에 돌아가면 꼭 그 영화를 보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 영화의 줄거리가 궁금해 “어떤 영화냐”고 묻자 그녀는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다”며 수줍은 미소와 함께 팔짱을 다시 한번 바짝 붙들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다시 그녀가 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내가 하룻밤을 지낼 스튜디오를 자신의 집 부근에 미리 마련해 두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스튜디오는 원래 한국 유학생의 자취방인데 그녀..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15) 프라이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15) 나는 외국에 나가면 한 번쯤 서점에 들르곤 한다. 호텔 방에서 나홀로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데는 책만한 게 없다. 그래서 현지에서 영어로 쓰인 책을 구입해서 읽는 게 취미가 되었다. 그녀를 따라 세느강변에 있는 세익스피어서점에 갔다. 그녀는 “이 책방은 시내에 나오면 간혹 들르는 곳인데 그렇게 크지 않지만 나름 유명한 서점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아마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것 같았다. 나는 서가에 꽂힌 책들 가운데 영어로 쓰인 책들만 골라서 훑어보았다. 그리고 주로 소설 등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녀는 다른 코너에서 미술과 관련한 전공분야 서적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미국 작가의 소설 한 권을 골랐다. 그녀는 내가..